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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교급 배구선수와 땅꼬마 선배 (2)

외전/단편소설

by 눈보라양 2022. 9. 2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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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삑-! 삐이이이익-!

시합 종료를 알리는 경쾌한 휘슬 소리와 함께 함성 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땅이 흔들리는 듯한 분위기에 흠뻑 젖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선배에게 뛰어가 안겼다.

“압승이에요, 압승! 역시 우리는 최강이라니까요!”

“야, 더워, 더워. 앵겨붙지 마.”

“헤헤, 그렇게 말해도 기분 좋으면서.”

내가 아메가오카 고등학교 여자배구부에 입부한지 어언 2년. 우리 배구부는 웬만한 대회의 우승이란 우승은 전부 휩쓸어 갈 정도의 강팀이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성장해서 어느새 국내 최고의 배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되먹은 재능이지, 나.

운동신경이 전혀 없던 뚱보 여자애가 운동 좀 열심히 했다고 전국제패라니 말도 안 돼. 소년만화는 점차 강해지는 묘사라도 있지, 이건 일말의 개연성도 없는 전개다.

“그만큼 재능충이시라는거지~”

“앗, 치카 씨! 응원하러 와 주셨었군요!”

긴 하늘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어낸 여성이 인파 사이를 비집고 우리 선수단을 향해 다가온다. 엔노시타 치카 씨. 내가 입부함과 동시에 졸업하셨던 선배다. 함께 경기를 뛰어보진 못했지만, 내가 중학교 때 실수로 배구공을 쳐서 날려 보냈을 때 만난 적이 있었지. 그때 내 재능을 알아보시고 배구부 입부를 추천해주셨던 내 은사같은 분이다. 그 후 프로에 입단하고 나서도 종종 모교에 놀러오셔서 밥도 얻어먹으시고, 코칭도 해주시고, 밥도 얻어먹으셨던 좋은 분이시다.

...어째 밥만 얻어먹으러 오셨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프로라는 양반이 왜 고등학생들한테 밥을 얻어먹고 있는거냐고. 보통은 반대 아닌가.

“이야, 정말 압도적인 실력이었어! 며칠 뒤에 있을 결승전에서도 손쉽게 우승하겠는걸? 나 있을 때도 그렇게 해주지. 나도 우승해보고 싶었단 말야~”

“어라, 치카 씨는 우승 못해보셨어요? 되게 의외다.”

치카 씨가 한탄하듯이 칭얼거리자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내 품에 안겨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저 인간이 기본 실력은 좋은데, 이상하게 기합이 들어가면 일이 꼬인단 말이지. 결승전에서 저 새끼… 아니, 저 선배 때문에 경기 말아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니 좆같네. 와, 진짜 그 다 이긴 경기를.”

“아니, 그게 왜 내 탓인데?! 그 날따라 경기장 조명이 이상했던거라고 몇 번을 말해! 으흑, 진짜 너무한다, 치요짱. 오랜만에 만난 선배한테 그런 폭언을…”

“폭언이고 나발이고, 괜히 후배들 잘나가고 있는데 꼽사리껴서 암흑기운 불어넣지 마십쇼. 훠이훠이.”

“으앙! 너무해! 귀여운 후배한테 내 존재를 전면으로 부정당했어! 마후유 짱, 네가 나 대신 치요 짱 좀 혼내주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치요짱 선배는 주장이신걸요.”

“야, 마후유. 은근슬쩍 ‘짱’ 끼워넣지 마라. 뒤지고 싶냐?"

귀여운 겉보기와는 달리 살벌하게 살인예고를 때려박는 이 선배는 히나타 치요. 치카 씨와 함께 내 재능을 발견하고 배구부에 스카웃한 선배이자 현재 우리 팀의 주장이다. 150cm도 안되는 신장은 배구선수는 물론 일반인 기준으로도 굉장히 작은 키지만,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국내 최고의 수비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작은 마왕’. 우와, 새삼 생각하는거지만 멋있어. 나도 저런 멋들어진 별명 가지고 싶다.

물론… 그녀가 마왕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실력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있다. 우선은 치요 선배 특유의 카리스마. 조그마한 외형에 맞지 않은 아우라로 주변인들을 압도하는 재능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는 험한 입이다. 공식 인터뷰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어느정도 예의를 갖추시긴 하지만, 주변인들에게는 가차없이 폭언과 욕설을 내뱉는다. 가령…

“마후유! 훈련 중에 정신 똑바로 안차려? 그러다 다치면 네가 책임질거야, 병신아?!"

“마후유 이 미친새끼가 또 말도 없이 훈련을 째? 10초 안에 안 튀어오면 내가 직접 조져버릴거라고 전해."

“야, 마후유. 이게 다 칼로리가 얼마냐? 네가 사람이야 돼지새끼야? 체중조절 하라고 몇번을 말해야 해?"

...음. 어째 나만 혼나는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이겠지.

물론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속내는 따뜻하신 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커녕 학교폭력 가해자로 퇴학당했겠지. 거친 입과는 다르게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경우도 많고, 저런 잔소리도 전부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나저나 마후유 짱, 못 본 사이에 키 엄청 컸다~ 벌써 내 키는 뛰어넘은 것 같은데?"

"헤헤… 1cm만 더 크면 190cm 돌파에요. 이왕 커버린 거 클 때까지 클 수 있으면 좋죠!"

"넌 임마, 그만 커 그만. 거기서 더 클 거면 10cm만 나한테 줘."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갑자기 치카 선배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나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에이, 그건 안 되지~ 마후유 짱은 프로 구단 사이에서도 엄청 주목을 받고 있으니까."

"네…? 제, 제가요?"

치카 씨의 입에서 나온 '프로'라는 단어. 지금까지 배구를 하면서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단어다. 나에게 있어 배구는 단순한 취미. 프로는 치요 선배처럼 인생 전부를 배구에 쏟아부은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몰랐어? 역대 최장신 기록! 압도적인 피지컬과 실력으로 전국 대회를 휩쓸고 있는 천재 여고생 니시노야 마후유~ 라는 명성으로 유명해. 지금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너를 눈독들이지 않는 구단이 없을 정도야."

"그, 그래요…?"

"..."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치요 선배를 힐끗 쳐다보았다. 역시나 표정이 좋지 않다. 키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일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와는 달리 곧 드래프트를 앞두고 있는 치요 선배는 프로 구단의 평가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치요 선배가 가장 고민하는 건 작은 키 때문일거고...

치요 선배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눈치 챈 치카 씨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무, 물론 치요 짱도 여러 군데에서 관심이 있어~ 그 왜, 저번에 우리 구단 스카우터 아저씨랑 얘기했을 때 히나타 치요라는 친구 어떻냐, 성격은 어떻냐 등등 물어보시더라니까? 분명 상위 라운드는 아니더라도 중하위 라운드에서 뽑아가실 게 틀림없다구.”

“...됐어요. 어차피 내가 잘 하면 되는거니까."

그렇게 무심한 듯 말한 치요 선배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살짝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 밖을 향했다.
선배에 이어 다른 팀원들도 줄줄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아직 경기의 열기가 식지 않은 코트에 선수라고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치카 씨.”

“응?”

“치요 선배, 정말 프로 갈 수 있어요?”

내 물음에 치카 씨는 잠시 뜸을 들였다.

“치요 짱이 누구보다 배구를 좋아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하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운동해 왔으니까. 그래도…”

“힘든...가요?”

“힘들지. 아무리 고교 때 성적이 좋아도, 결국 프로 구단의 스카우터들은 잠재력을 보니까. 일반인 수준의 피지컬이라도 된다면 또 모를까, 치요 짱의 몸으로는 배구 선수로는커녕 다른 종목의 프로 선수로 활약하는 것조차 힘들지 않을까, 싶어.”

“그런…”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치카 씨. 나는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를 발견하고 우르르 밀려오는 취재진들의 파도에 휩쓸려 더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니시노야 선수! 승리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가능할까요?”

“다수의 프로 구단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혹시 선호하는 구단이 어디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해외 진출을 노리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우, 우와아아앗…! 잠깐만요, 한 분씩 좀!”

결국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터뷰에 전부 응해버린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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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부터 며칠 후, 우리 학교 배구부는 단체로 테마파크에 왔다. 결승전을 앞두고 긴장도 풀 겸 감독님이 휴식 차원에서 배려해 주신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 놀이공원에 놀러갈 친구도 없었던 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놀이공원 입구에 도착한 나는, 먼저 도착해 있던 히나타 치요 선배와 엔노시타 치카 씨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엥? 치카 씨는 왜 있지.

“~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미리 얘기해두는데, 난 이래뵈도 결승전을 앞두고 특훈을 위해 학교 측에서 붙여준 임시 코치라구. 선수단과 동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임시 코치가 보통 선수들이 놀러가는데도 따라오나요…?”

“몰라. 내가 봤을 때 이 아줌마, 그냥 놀고 싶어서 따라온 듯?”

“아줌마라니! 치요 짱 너보다 겨우 두 살 많거든?! 아직 소녀소녀한 스물 한 살이라고!”

솔직히 하는 행동을 보면 스물 한살은커녕 열 한살로 보이는데요.
...라고 올라올 뻔한 말을 조심스레 삼킨 채, 나는 허리를 살짝 숙여 치요 선배의 손을 잡았다.

"그럼 선배, 갈까요?"

"우웩, 손은 왜 잡냐?"

"음… 선배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참 나… 길 잃는 건 너겠지, 멍청아. 내가 안 도와주니까 경기장 입구를 못 찾아서 5분 전에야 겨우 들어온 주제에.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그, 그건 그렇지만요."

우리의 바보같은 대화를 옆에서 듣던 치카 씨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후훗,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이 좋구나?"

"...말도 마요. 내가 이 새끼 때문에 머리 아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만사가 피곤하다는 듯이 말하는 치요 선배. 그러자 치카 씨는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래도 마후유랑 말할때마다 네 목소리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게 느껴지는걸? 소꿉친구로써 질투날 정도라니까~"

"윽?!"

치요 선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가 사고 치는 바람에 화나서 빨개진 적은 있었어도, 저렇게 당황해서 빨개진 얼굴의 선배는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지금이 몇 시였더라… 음, 그럼 5시까지 자유시간 줄테니까, 재미있게 놀다와~"

"이 인간이 진짜…!"

…나중에 저 얼굴을 한번 더 보고싶다. 엄청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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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라 그런지 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키가 큰 편인 나야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선 등대마냥 인파 속에서 시야를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꼬꼬마 선배는 이리저리 치이기 일쑤였다.

"꼭 붙잡으세요, 선배. 길을 잃을지도 몰라요."

"시발… 이래서 붐비는 곳은 싫다니까."

선배가 꿍해있는 사이 나는 저 멀리서 인형탈을 쓴 사람이 풍선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잔뜩 신이 난 나는 선배를 잡아당겼다. 놀이공원과 인형탈, 그리고 풍선이라니! 완전히 낭만 그 자체 아닌가?

"선배, 선배! 저기서 풍선을 나눠주는 것 같아요. 빨리 가 봐요!"

"알겠으니까 살살 데리고 가, 미친년아… 팔 빠지겠어."

우리는 인파를 헤치고 인형탈을 쓴 사람 근처에 왔다. 테마파크의 마스코트처럼 보이는 인형탈은 파란색과 분홍색 조합의 피에로 옷을 입고 있는 동글동글한 캐릭터였다. 이름은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인형탈을 쓴 사람은 눈을 빛내는 나를 보더니, 기다란 풍선을 이리저리 돌려서 순식간에 강아지 모양을 만들었다. 나는 강아지 풍선을 건네받았다. 기분이 완전 좋아졌다!

"에휴, 고등학생까지 돼서 풍선 하나 받고 그렇게 히히덕 댈 일이냐?"

"그럼요~ 흐헤헤."

"됐다, 네가 좋으면 된 거지.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도 수고하십니다… 응?"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보던 선배는 이내 눈을 돌려 인형탈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하는 선배를 본 인형탈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무엇인가를 선배의 손에 쥐어주었다.

"...풍선?"

줄이 달린 풍선이었다. 선배의 시선은 손에 잡힌 줄을 타고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풍선의 디자인에서 우뚝 멈춰섰다.

핑크핑크한 여아용 아이돌 애니메이션 캐릭터였다.

"..."

"풉… 푸풉!"

똥을 씹은 것 마냥 표정이 썩어들어간 선배. 그리고 필사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찾는 나. 꼬마아이로 오해받은 선배는 피어오르는 아우라로 '좆같음'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인형탈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하게 다른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고 있었다. 물론 인형탈은 원래 표정 변화가 없다.

"야, 마후유.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저 새끼 뚝배기를 깨버려도 합법 아닐까?"

"왜 그래요? 잘 어울리는데."

"이 새끼가 뒤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선배는 나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꺄르륵 웃으며 피했다. 선배는 짜증난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쪽팔리니까 네가 들고 있어."

"마음에 안 들면 버리셔도 되잖아요?"

"저 사람이 나눠준거잖아. 눈 앞에서 버리기엔 좀 그래."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리는 치요짱 선배. 방금 전까지는 인형탈을 쓴 사람을 죽일듯이 노려보더니…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 물론 선배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놀리고 싶어지는 건 자연의 이치지만.

"전 지금 다른 짐 때문에 들 손이 없어요."

"그럼 차라리 그 짐을 줘!"

"후배가 감히 선배한테 짐을 맡기다뇨? 충직한 직속 후배로서 그럴 순 없죠!"

"씨발, 이딴 것도 후배라고. 나가 뒤져 썅년아!"

나와 선배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며 놀이공원을 돌아다녔다. 여아용 풍선을 들고 돌아다니는 선배의 얼굴은 새빨간 홍조가 사라지질 않았지만, 듬직한 평소의 선배와 갭이 느껴져 귀여웠다.

그렇게 단 둘이서 놀이공원 데이트를 하는 것이 몇 시간 째. 우리는 이 테마파크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인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줄이 기네요."

"그러게. 5시까지는 돌아가야 할텐데."

지루한 시간을 이런저런 수다로 때우던 우리는, 어쩌다보니 프로 선수 지명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생각했던 대로,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를 시작해 고등학교 대회에서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 치요 선배는 프로 진출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을 바쳐 해온 게 배구니까. 프로 선수가 꿈일 수 밖에 없지."

"헤, 헤에…"

적당히 맞장구쳐주고는 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치카 씨가 한 말이 맴돌고 있었다. 프로 구단들은 당장의 성적보다는 미래의 잠재력을 본다는 그 말. 일반인 기준으로도 매우 작은 치요 선배는 프로 데뷔가 힘들 거라는 그 말…

"그,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프로 구단에 지명받지 못하면, 선배는 뭘 하실거에요?"

"..."

선배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대학 리그에서 뛰는 방법도 있겠지만… 날 대학에 보내 줄 만큼 우리 집 사정이 좋지는 않아서. 당분간 부모님 일이나 도우면서 지내야겠지."

"배, 배구는요…?"

"힘들겠지.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조금 생활이 안정되면 실업 배구단에나 들어갈까 해."

담담하게 말하는 선배. 평생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을 말하는데도 그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선배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서 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든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했다.

"아, 아 참! 치요 선배, 그거 들으셨어요? 이번에 단간론파 시리즈의 신작이…"

"거, 실례 좀 하겠수다."

내 말을 끊고 등장한 덩치 큰 남자 여러 명. 자연스럽게 새치기를 해서 치요 선배의 앞에 선다. 그 광경을 보던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생이 남자들에게 주의를 주려고 다가오자, 남자들 중 한 명이 아르바이트생을 삐딱하게 노려봤다.

"뭐야, 뭐 볼일 있어?"

"히, 히이익…!"

험상궂은 남자들의 모습에 잔뜩 겁먹은 아르바이트생. 굵은 팔뚝에 비슷한 문신을 잔뜩 하고 있는 그들은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보였다. 덩치 큰 남자들 사이로 드문드문 화장을 잔뜩 한 여자들이 끼어있는 걸 보아, 단체로 데이트라도 나온 걸까 싶었다. 그런 조폭 무리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앞뒤로 줄을 선 사람들도 우물쭈물하며 감히 그들에게 뭐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저기요. 민폐니까 뒤로 가시죠?"

"엉?"

내 앞에 서 있던 치요 선배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민폐~? 푸핫, 그래서 어쩌라고?"

"말했잖아요? 뒤로 가라고. 설마 귀에도 살이 쪄서 내 말이 안 들린건가?"

선배가 목소리를 깔고 도발하자 여유롭던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의 다른 일행들도 누가 감히 우리에게 시비를 거냐는 듯 선배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황급히 선배의 뒤에 숨어서 속삭였다.

"서, 선배! 뭐 하시는 거에요? 괜히 저 사람들이랑 엮여서 좋을 거 없다구요!"

"있어 봐, 새끼야. 그럼 몸만 크고 대가리는 애새끼인 좆밥새끼들을 구경만 쳐 하고 있어야 하냐?"

"하! 애새끼에 좆밥새끼라고?"

"누굴 진짜 등신으로 보나."

치요 선배의 말에 발끈한 남자들이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꼬운 표정으로 미동도 없이 남자들을 응시하는 선배와 그 뒤에 쪼그려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 크, 큰일 났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던 말이 일을 더 키워버렸어…!

"어이, 잠깐. 이 녀석들, 아메가오카 배구부 녀석들 아니냐?"

그 때, 무리의 중간 쯤에 서 있던 남자가 우리의 얼굴을 보고서는 그렇게 말했다. 입고 있는 옷이나 풍기는 분위기를 봤을 때, 이 조폭 무리의 대장처럼 보였다. 다른 일행들을 제치고 우리 앞에 선 대장은 씨익 웃으며 선배에게 말했다.

"이거 실례했군. 우리 애들이 단체 미팅을 와서 흥분해서 말이지."

"...저희를 아십니까?"

치요 선배가 무뚝뚝하게 답하자 대장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한 담배 연기에 나는 물론이고 선배도 눈을 찌푸렸다.

"내가 열렬한 스포츠 팬이라서 말야. 축구, 야구, 배구는 물론이고… 너희들이 뛰고 있는 고교 배구 리그도 매일 매일 체크하고 있어. 그게 다 돈줄이니까."

"돈줄…?"

"뭐, 나름대로 커다란 스포츠 베팅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거든. 아가씨들도 심심하면 들러보라고. 낄낄낄."

"..."

100% 불법 사이트다, 저거. 풍기는 분위기가 절대로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잔뜩 긴장한 내 얼굴을 본 대장은 여유롭게 담배를 들이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말인데… 며칠 뒤에 있을 전국대회 결승전. 압도적인 아메가오카 고교의 기세에 힘입어 너희 학교 쪽에 베팅한 사람들이 95%가 넘거든."

"..."

"만약에 아메가오카 고교가 진다면 반대 쪽에 베팅한 사람은 어마어마한 돈을 쓸어담겠지. 그렇지 않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치요 선배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나는 선배가 괜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걱정돼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작은 마왕' 히나타 치요 양, 그리고 '슈퍼 루키' 니시노야 마후유 양. 자네들이 결승전에서 일부러 져 준다면 섭섭치 않은 보상을 약속하지."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한 경기만 열심히 하지 않아도 짭짤한 돈을 만질 수 있을..."

"좆까, 병신아."

크, 큰일났다!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을 뱉어버리고 만 선배를 내가 울먹이며 말려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선배는 날카로운 눈으로 대장을 바라보며 사납게 말했다.

"지금 나더러 승부조작을 하라고? 엿이나 먹어라, 개새끼야. 우리가 좆만한 고등학생이라고 만만해 보이냐?"

"이게…"

"그깟 돈 몇 푼으로 지금까지 해온 팀원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생각은 1도 없어, 병신아. 우린 내버려두고 저기 시궁창에나 들어가서 좋아하는 돈이나 쳐 드시고 사세요. 응?"

"야, 이 년아! 형님이 선심 써주신 걸 감히 그딴 식으로!"

대장의 뒤에서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한 남자가 씩씩대며 선배에게 소리쳤다. 반면 대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더니,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뱉고선 싸늘하게 말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는 데 말이야."

"..."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고. 결승전을 며칠 앞두고, 아메가오카 고교 배구부의 주축 선수가 '불의의 사고'로 결장하는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

"얘들아, 가자."

대장의 서늘한 목소리에 조폭 일행은 순식간에 자리를 빠져나갔다. 완전히 얼이 나간 채 쪼그려앉은 나와 묵묵히 서 있는 치요 선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폭 무리에 겁먹고 한참 전부터 자리를 뜬 것 같았다.

선배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뒤에 앉아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덜덜 떨고 있는 나를 향해 손을 뻗은 선배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무서웠지?"

선배는 조심스레 나를 일으켜 주었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안하다. 네가 뒤에 있는데 평소처럼 행동해버렸네. 괜히 시비가 붙었다가 네가 다칠 수도 있는데."

"아니에요. 선배야말로 다치지 않아서 다행인걸요."

"...나보단 네가 다치지 않는 게 우선이지."

선배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랑 다르게 넌 프로 무대에서 활약해야 하잖아?"

"...!"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치요 선배의 프로 데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던 대화가 오버랩되었다. 프로 무대를 갈망하던 선배는, 평생을 그 꿈을 향해 달려온 선배는.

그 꿈을 내가 대신 이루어 주었으면 하고 있었다.

"...저는…"

나는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우리 앞의 줄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앞으로 달려가 롤러코스터에 탈 차례였다.

"먼저 가. 저기 표지판 보이지?"

키 150cm 이하는 탈 수 없다는 문구였다.

"기다리고 있을게. 재밌게 즐기고 와."

"...오랫동안 기다리셨잖아요. 같이 타면 안 돼요?"

"난 못 타잖아, 바보야."

치요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선배는 애써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기가 힘들어서, 나는 얼른 롤러코스터의 입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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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는 재미있었다. 분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레일을 한 바퀴 돌고 나온 후 정차한 후에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비틀비틀거리며 섹션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 있는 시계탑의 시침이 5시를 향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집합해야 하는데… 치요 선배는 어디 있지?"

분명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북적하던 아까 전과는 달리 비교적 한산해진 놀이공원인데도 불구하고 선배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서, 설마…"

불현듯 방금 전 시비가 붙었던 조폭 무리들이 생각났다. 분명 그 살벌한 인상의 대장이 우리를 협박하는 듯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운동선수인 선배가 힘이 약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 덩치 큰 남자들에게 둘러쌓인다면 손 쓸 새도 없이 안 좋은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재빠르게 선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집합 장소는 물론이고 화장실, 식당가, 다른 놀이기구까지. 그 많은 곳을 샅샅이 뒤져봤는데도 선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선배…"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선배가 변을 당하면 어쩌지? 얼마 뒤에 프로 구단들의 신인 지명이 있을텐데. 지금 시점에서 봉변을 당하면 실낱같은 희망조차 날아가게 된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한참을 달리던 나는 어느새 놀이공원 구석에 위치한 으슥한 숲길 쪽으로 들어섰다. 상당히 외곽에 있는 곳인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선배의 이름을 부르며 두리번거렸다.

"선배, 치요 선배~!"

대답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좀 더 크게 외치며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치요 선배, 어디 계신…"

"쉿."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목이 맞닿은 차가운 금속의 감각.

나는 온 몸이 얼어붙었다.

"평생 불구로 살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등 뒤에서 조용하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나무 사이사이에서 덩치 큰 남자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 줄에서 본 그 조폭 무리였다.

"그 꼬맹이는 놓쳤지만… 오히려 더 큰 대어를 잡았군."

잔뜩 낀 가래를 땅에다 뱉으며 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든 날카로운 나이프를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뭐, 너무 겁 먹지 말라고, 아가씨. 우리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 아, 아, 아니요…."

"그치? 그런데 우리가 뭐. 아가씨를 죽이기라도 하겠나?"

대장은 휘파람을 불면서 여유롭게 나이프를 돌렸다. 내 시선은 번뜩이는 나이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다리 힘줄 조금 자르고… 못 걸을 정도로만. 고 정도만 할거야. 겁 먹지 말어?"

"히, 히이익!"

대장의 말에 완전히 공포에 질린 나는 몸을 비틀어 도망치려고 시도했지만, 내 뒤쪽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에게 양 팔이 붙잡혀 완전히 제압당해버리고 말았다.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발요."

"에헤이, 거 참. 안 죽인다니까? 자꾸 그러면 진짜로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내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사이 대장은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내게 다가왔다. 마지막 저항으로 애처롭게 헛발길질을 해보자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인원들이 나서 양 다리를 붙잡고 나를 강제로 꿇어 눕혔다.
난 수 명의 남자들에게 짓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거, 테이프 좀 가져와서 입 좀 막아봐라. 척 하면 척해야지, 이런 것까지 내가 시켜야 돼?"

"죄송합니다. 여기…"

"으흑, 으읍, 읍!!"

난 눈물 콧물을 있는대로 쏟아내며 꿈틀거렸다. 거친 남자의 손에 의해 입이 청테이프로 막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포에 떨며 오열하는 것 밖에 없었다.

대장의 손에서 빙글대며 돌던 나이프의 소리가 멈춘 그 순간.





"잠깐!!"




익숙한 목소리.
전력을 다해 뛰어 온 건지, 숨을 채 고르지 못해 헐떡이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히나타 치요 선배였다.

"어이쿠, 주장님 아니신가. 도망친 거 아니었어?"

"...그 애를 놔 줘."

등 뒤에서 들리는 치요 선배의 목소리. 난 고개를 돌려 선배를 보고 싶었지만, 온 몸이 짓눌린 상태라 그럴 수 없었다.

"푸하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놔주지 않으면 뭐, 경찰에 신고라도 할텐가?"

"...그렇다면?"

"신고 해 봐! 짭새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난 후에는 이 아가씨의 다리는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있겠지만 말이야."

이 남자들같은 조직폭력배들에게 감옥에 갔다 오는 것은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감옥에 가도 금방 출소할 자신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다쳐버린 다리는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

대장은 그렇게 말하는 듯 했고, 선배도 그걸 이해했기에 쉽사리 신고 전화를 할 수 없었다.

"...뭘 원하는거야? 어떻게 하면 그 애를 풀어줄거지?"

"큭큭, 아까부터 말하고 있잖나. 아메가오카 고교의 패배라고. 하지만 평화적인 방법은 이미 물 건너 갔어."

등 뒤에서 대장이 쭈그려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무릎 뒤의 오금 부분을 살짝 찌르는 게 느껴졌다.

"으으으으으읍!!!!"

"기다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선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날 짓누르는 남자들은 실실 웃으며 자기들끼리 키득댔다.

선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은, 우리 학교의 전력을 없애는 게 목적이잖아."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그 애 말고 내 쪽이 더 낫지 않아?"

뭐?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 애를 풀어 줘. 대신 내 몸을 어떻게 하든 상관 없으니까."

"크하하하! 눈물겨운 희생정신이군.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네 녀석과 이 아가씨 둘 다 반병신으로 만들어도 아무 문제 없는데? 굳이 이 아가씨를 얌전히 풀어줄 이유가 어디 있지?"

살살 신경을 긁는 듯 한 대장의 말투에 선배는 입을 꾹 닫았다. 몇 초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잠깐 동안 고민하던 선배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내 힘줄을 끊겠어."

"응?"

"읍?! 으븝! 우으으읏 읍읍!"

"어쨌거나 당신들이 일을 벌인다면, 경찰의 추적 때문에 귀찮아지는 건 팩트잖아? 스포츠 베팅에 얼마가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고등학교 배구 때문에 감옥에 갈 리스크를 지는 것도 웃긴 일이고."

"으읍! 으브으으으읍!"

"내가 내 다리에 상처를 입히면, 그건 단순히 자해니까… 당신들은 아무 리스크를 질 필요 없어. 아메가오카 고교의 최대 전력인 내가 돌연 부상으로 은퇴한다는 결과만 남을 뿐이지."

"호오…"

안 돼요. 그러지 마.

"증거를 원한다면 영상을 찍어도 좋아. 대신 그 애는… 마후유는 풀어주겠다 약속해."

제발. 나 때문에 당신의 꿈을, 인생을 포기하지 마.

남자들이 움직인다.
누군가 주머니에서 여분의 나이프를 꺼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이프가 땅바닥에 툭 던져지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그걸 줍는 소리가 들린다.
손이 떨리는지 바닥의 낙엽이 부스럭댄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입은 막혀 있지만 큰 소리를 내서 울었다.

선배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들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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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관 직전의 한적한 놀이공원.

어느새 땅거미가 져 가는 그 곳에 두 사람이 힘 없이 움직인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한테 업힌 채 걸어가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치요 선배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차마 내 눈으로 상처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선배를 업고 있는 내 손과 다리에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손으로 그 지경을 만들어놓고도 아직 의식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울고 있었다. 선배가 울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울음이 나왔다.
그래서 울음섞인 목소리로 원망하듯 소리쳤다.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거에요, 왜!”

선배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저 같은 거, 힘줄이 잘리든 다리가 꺾이든 내버려 두셨어도 됐잖아요. 중요한 건 선배 인생 아니에요?”

"..."

“인생 전부를 쏟아부은 배구를! 이제 다시는 못할지도 모른다고요, 선배가!!!”

응어리진 마음을 쏟아내던 나는 목이 매여 말을 멈췄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거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런 내 모습을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업힌 채 지켜보고 있었다.

“선, 배애…”

“그만 좀 쳐 울어, 새끼야… 안 그래도 뒤질 것 같은데 머리 아프게.”

“하지만, 하지만…”

내가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선배는 신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이제 선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겠지. 전국대회 우승도, 프로선수 데뷔도… 나한테는 물 건너 간 일이야.”

“그러면 왜…”

내가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하자, 선배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무너져도, 네가 남아있잖아. 새끼야.”

“...”

“분명 지금까지 쏟아부은 내 인생은 무의미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인생이라는 게 나 혼자만의 것은 또 아니거든.”

“...”

“인생을 함께하는게, 꿈을 이어나가는 게… 동료란 거 아니겠냐.”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결연하고 초연한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마후유.”

“네.”

“넌 내 동료야?”

무심한듯 툭 던진 말. 하지만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그녀의 인생 전부가 담긴 한마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힘겹게 답했다.

“네.”

“...그러냐.”

“...”

“그럼 됐어.”

그 말을 끝으로 선배는 구급차가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걸로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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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어제 있었던 전국 고교 배구 대회 결승전 이야기를 빼 놓을 수가 없겠는데요.]

[물론이죠. 아메가오카 고교의 심장, '작은 마왕' 히나타 치요 선수의 안타까운 부상 소식이 들렸을 때는 아무도 아메가오카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신예인 니시노야 마후유 선수의 압도적인 활약 덕분에 아메가오카 고교는 전국 제패를 이루어냈습니다.]

[어제의 니시노야 선수는 정말 무시무시했죠. 프로 선수들이 와도 그 스파이크는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치 괴물 같았어요.]

[괴물이라, 그거 좋네요. 마왕의 후계자로 등장한 괴물이라니.]

[하하하, 재밌군요. 그럼 아메가오카의 새로운 마왕, '괴물' 니시노야 마후유의 활약상을 지금부터 보시죠!]

"..."

TV를 끄자 순식간에 병실은 조용해졌다.
그 조용한 병실 안에 있는 건 얼굴이 화끈해진 나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치카 씨,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치요 선배.

"부, 부끄러워요…"

"이야, 멋있는데? '괴물' 님~!"

"...마왕도 그렇고, 대체 저딴 오그라드는 별명이 뭐가 좋다고 붙이는거야?"

분명 처음에 치요 선배의 별명을 보고 나도 저런 거 갖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진짜로 별명을 갖게 되니까 너무 부끄럽다. 괴물이 뭐야, 괴물이? 좀 귀여운 별명이라도 지어주면 좀 덧나나?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뭐라셔?"

"몇 달 동안은 휠체어 타고 다니면서 재활운동 틈틈히 할거라네요. 배구는 이제 무리겠지만… 노력해서 다시 걸을 수는 있게 돼야죠."

"...선배…"

병실 침대에 누운 채 담담하게 말하는 치요 선배. 그녀가 입원한 이후로 매일매일 빠짐없이 찾아온 나지만, 몇 번을 봐도 선배에게 미안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야, 마후유. 또 시발, 미안한 표정 짓지 너?"

"헉! 아니, 그게."

"미안해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내가 다친 건 내 선택이고 내 책임이야. 애초에 내 병원비도 네가 다 내고 있잖아? 내가 시발, 그렇게 사양을 했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요…"

시무룩해진 나는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선배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지만, 나 때문에 선배가 희생한 건 사실이다. 내가 평생 안고 가야 할테지.

옆에서 사과를 깎던 치카 씨는 싱긋 웃으며 내가 말했다.

"치요 짱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미안해하지 마, 마후유 짱. 계속 그러면 오히려 치요 짱을 불편하게 만들걸."

"하지만…"

"그래, 넌 내 신경 쓰지 말고 배구부 활동이나 열심히 해. 내 빈자리를 최대한 메워야 할 거 아니냐."

치카 씨가 깎은 사과 조각을 낼름 집어 먹는 치요 선배. 선배의 말에 나는 기운을 차리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치요 선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키보가미네 학원에서 온 스카우트도 단칼에 거절했으니까요."

"푸우웁!!!"

화들짝 놀라 손에 쥔 사과를 떨어뜨리는 두 사람. 뭐지? 내가 그렇게 충격적인 발언을 했나?

"뭐, 뭐, 뭐, 뭐? 키, 키보가미네 학원의 스카우트?!"

"아오, 병신새끼야!!! 말이 그렇다는거지, 그걸 거절하면서까지 지키란 소린 아니었어, 미치겠네!"

"네, 네, 여보세요? 키보가미네 학원이죠? 그, 지난번에 스카우트 제안 주셨던 니시노야 마후유 학생 보호잔데요, 네, 네…"

"뭐, 뭐에요?! 치카 씨가 언제부터 제 보호자…"

"하… 머리 아프네. 등신아, 잘 들어."

치카 씨가 허둥지둥거리며 키보가미네 학원에 전화를 거는 사이, 치요 선배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한 건, 너더러 내가 못 다한 일을 해달라는 뜻이 아니야. 네가 반드시 내 빈자리를 채우고, 내 꿈인 프로 데뷔를 하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그, 그렇군요."

"네, 네. 아, 가능하다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중으로… 네, 네."

치카 씨가 허공에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치요 선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네 꿈을 이뤄. 네 인생을 살고. 그게 곧 내 꿈이고 내 인생이니까."

"...네."

"우린 동료잖아, 그치?"

"네."

"크큭."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네가 키보가미네 학원에 간다니, 웃겨서."

"뭐에요, 진짜."

"아무튼…"


병실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드리워졌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선배의 얼굴을 비췄다.

"기다리고 있을게. 재밌게 즐기고 와. "

내 대답은, 물론 정해져 있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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