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헉…"
거친 숨을 내뱉는다. 육중한 몸을 뒤뚱뒤뚱 이끌고 간신히 달려온 끝에는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같은 편 주자가 있다.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한발짝, 한발짝 내딛는다.
“헉… 헉… 으, 으아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나는 운동장의 흙바닥을 뒹굴었다. 콜록콜록하고 기침소리를 내며 눈물 맺힌 눈으로 서서히 걷히는 모래먼지 너머를 봤다. 실망과 원망에 찬 여러 개의 눈초리가 내 몸을 쑤셔왔다.
“아… 또 졌다!”
“또 니시노야가 구멍이야? 지긋지긋하다 정말.”
“니시노야 쟤는 왜 저렇게 달리기를 못해?”
“뚱뚱하니까 그렇지. 우리 세 명 합쳐도 쟤가 더 무거울 걸?”
아프다. 쓰리다. 완전히 성대하게 구른 탓에 체육복 이곳 저곳이 뜯겨 맨 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반 아이들은 선두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1,2등을 목이 터져라 응원할 뿐, 제 풀에 지쳐 꼴사납게 나자빠진 내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난 니시노야 마후유니까. 잘하는 것 하나 없고, 못생기고 뚱뚱한 찐따니까.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바통을 주운 뒤 달려나가는 같은 편 주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쟤도 참 고생이구나, 괜히 나 같은 애의 뒷주자가 돼서… 그치만 어쩌겠어. 나도 달리기를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게 아니란 말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엉망이 된 내 체육복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더 울적해졌다. 나는 보건실에 가기 위해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트랙을 빠져나와 학교 건물 쪽으로 향했다. 선생님도 지금은 경주에 정신이 팔려있으니 따로 허락은 안 받아도 되겠지. 어차피 나 같은 거 하나 없어져봤자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들려오는 환호성을 뒤로 한채,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이겼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하고는 관계없으니까. 모두의 응원과 환호성을 받는 빛나는 자리에 내가 낄 자리는 없다. 나처럼 못난 패배자가 있어야 할 곳은 어두침침하고 쓸쓸한 학교 1층 복도지.
조용한 복도에 내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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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집으로 가던 중,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에서 여러명의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교복을 짧게 줄여 입고 저마다 손에 담배를 한개비씩 쥐고 있는 걸 보니 소위 말하는 일진들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우와, 무서워라~ 자세히 보니 몇 번 학교에서 마주친 것도 같다. 분명 복도에서 덩치 큰 남자애들이랑 시시덕대고 있던 3학년 선배들이었지. 질 안 좋기로 유명한 무리들이다. 저런 위험한 사람들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찐따의 법칙 제 1조 1항. 참고로 1조 2항은 없다. 아직 생각 안 해 봤거든.
아무튼 내가 멋대로 정한 원칙에 철저히 따라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존재감없이 그 골목길 부근으로 향했다. 좋아, 잘하고 있어, 마후유! 너의 존재감 없는 체질이 처음으로 고마워지는 순간이야!
"야, 거기 너. 일로 와봐."
헉.
망했다.
"너 우리 학교 애지? 이름이… 니시노야. 니시노야 마후유. 오케이, 딱 기억해뒀어."
"있잖아, 언니들이 돈이 궁해서 그런데 5000엔만 빌려주지 않으련? 꼭 갚을게."
쭈뼛쭈뼛 걸어간 내게 어깨동무를 걸어오며 돈을 요구하는 일진. 나의 찐따 레이더를 통해 일진어를 번역해 본 결과, 잔말 말고 5000엔이나 내놔라라는 뜻이다. 내 학교와 이름을 체크한 것은 후에 나를 찾아와 돈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용이하나, 실상은 너를 내 현금인출기로 지정했으니 앞으로 잘 찾아가마~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와, 무서워라. 이거 완전 빼도박도 못하게 됐잖아.
"저, 그, 제가 지금 돈이 없는데…"
"없어? 진짜? 토실토실한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구만. 내 팔뚝을 봐, 얼마나 비실비실하니~"
"뭐래, 언제는 지 살쪘다고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대더니."
"얘보단 나은 거 아님? 얘 보고 나 보니까 엄청 날씬해보이지 않아? 나 다이어트 안해도 될듯."
"엌ㅋㅋㅋㅋㅋㅋㅋ"
침착하자, 침착해. 이 사람들은 순전히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한거야. 나한테 돈이 없다는 걸 최대한 어필하면 재미없다면서 나를 놓아 줄 가능성이 높아. 최대한 숨기는 것이 없는 것처럼, 청렴결백하고 또박또박하게 반론하자!
"저, 저, 저는 지, 진짜 도, 돈이 어,어, 없는데요오오…"
아, 망했다.
"에이, 친구야. 구라 치지 말고… 나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일진 패거리는 내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으으, 난 왜 이렇게 연기에 재능이 없는거람! 연기는 바라지도 않으니 긴장한 티만 내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내가 자신의 멍청한 대처에 후회하거나 말거나, 일진 패거리들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
멀리서 들려서 뭐라고 하는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골목길 너머에서 들려온 귀여운 목소리에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연보라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뚱한 표정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키는 약 150cm가 안되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친구니?"
"모, 모르는 사람인데요…"
알 턱이 있나, 당장 같은 반에도 친구가 없는데 공통점이라고는 1도 없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와 친분이 있을 정도로 내 인간관계가 넓을 리 만무하다.
"어머, 꼬마야. 언니들이 지금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서 그런데, 딴 길로 가 주면 안되겠니?"
"그래, 그래. 너같은 어린애가 보기엔 영 좋지 않은 장면이라구."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패거리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는 듯 여자아이는 무심하게 내 쪽으로 걸어온다.
약 1m. 일진 우두머리와의 거리가 그 정도에 다다랐을 때, 여자아이는 입을 열었다.
"꺼지라고, 애미 뒤진 씨발년들아. 내가 좆으로 보여? 내 말을 귓등으로 쳐들었나."
...엥?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귀엽고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고 걸쭉한 욕설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느낀 감정도 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는지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시---발, 키가 좆만하니까 애새끼들이 나를 다 잼민이로 보네? 야, 너 어디 학교 몇학년이냐?"
"어, 어…? 미나가와 중학교 3학년…"
"나 고1이야, 이 병신새끼들아. 어딜 하늘같은 선배 앞에서 가오를 잡아? 시발, 좆같은 애새끼들이 지랄 염병을 떨어요."
세상만사 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칵 하고 가래를 뱉어낸 여자아이는 한 사람의 앞에 바짝 다가가 다리를 슬쩍 들더니…
쾅!
“3초 줄게. 꺼져.”
...그대로 벽에 내리꽂았다.
여자아이의 발이 박힌 벽에 쩌적쩌적 금이 간 걸 곁눈질로 슬쩍 본 일진의 표정에는 공포와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자기보다 한참 작은 여자애의 발길질에 벽돌에 금이 갈 정도면, 심지어 그 발길질이 자기 옷깃을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근접했다면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야, 야. 저거, 히나타 치요 아냐?”
“그, 그래. 들어본 적 있어. 아메가오카 고등학교의 미친개, 히나타 치요…!”
“누구더러 미친개래, 개새끼들아!”
“히이이익!”
여자아이, 그러니까 히나타 치요의 일갈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일진 무리들은 모두 지레 겁먹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우와, 진짜 빠르네. 내 달리기 최고기록의 세 배는 더 빠르겠다.
멀어져가는 무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으니, 뒤에서 짜증섞인 한숨과 함께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야.”
“아, 네, 네!”
“찐따같이 쫄고만 있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돈이 없으면 없다고 뭐라도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덩치도 큰 게 싸우면 니가 다 쳐바를 것 같구만.”
“그, 그,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네? 저기, 그게…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시발, 한 번만 더 죄송하단 말 내뱉어 봐, 주둥아리를 꼬매버릴테니까.”
그녀가 내뿜는 아우라에 무심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 했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아니, 저 매서운 눈동자를 보고 어떻게 죄송하다는 말이 안 튀어나올 수가 있냐고요. 죄 한번 안 짓고 살아온 성인군자도 괜히 쫄려서 석고대죄하게 생겼구만.
“옷은 시발 꼴이 그게 뭐냐? 거지새끼야?”
“이건 그, 운동장에서 넘어져서…”
“시발, 돼지새끼 아니랄까봐. 따라와, 병신아.”
무서워, 역시 무서워!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는 게 이런 뜻일까, 기껏 일진들에게서 벗어났는데 더 큰 고난이 찾아온 것 같다. 아까의 전투로 획득한 경험치를 통해 업그레이드 된 내 찐따 레이더 ver 2.0에 의하면 이건 분명히 위기 상황이야. 어떻게든 도망칠 구실을 만들지 않으면...
“저,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 가는지 잠깐 여쭤볼 수 있을까요?”
“우리 학교.”
“학교는 왜…?”
“너 그 꼴로 돌아다닐거냐? 우리 학교 체육관에 남는 체육복 있으니까, 그걸로 갈아입고 가.”
...뭐야, 이 사람. 상냥해. 무지 상냥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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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타 씨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아메가오카 고등학교. 내가 다니는 아메가오카 중학교는 이 고등학교의 부속 학교다. 다시말해 이 사람은 어떻게보면 내 선배라는 소리.
“뭘 그렇게 이리저리 둘러보냐? 시골 촌놈도 아니고.”
“아, 아뇨. 나중에 제가 다닐 학교니까, 이번 기회에 조금 둘러보려고…”
“너 아메중 다닌다고 했었나? 하긴, 그쪽 애들은 대부분 여기로 진학하니까, 그럴 수 있겠네.”
귀찮은 듯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장서서 걷는 히나타 씨와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히나타 씨를 바짝 따라다니는 내 모습은 꽤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 댈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하교시간이라 체육관에 남아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말이지.
“이야, 치요짱~! 왜 다시 왔어~? 뭐 놔두고 온거라도 있어?”
“아뇨, 찐따 한 명 주워왔습니다.”
뜨끔…
“찐따라니, 너무한다~ 치요짱은 입이 너무 험한 게 문제라니까. 그러다 시집 못 가는 수 있어?”
“됐네요, 됐어. 그보다 부장, 아직까지 남아서 연습하고 계셨던검까? 좀 쉬셔도 될텐데.”
“아냐, 부상으로 두 달 동안 쉬었으면 그만큼 노력해야지. 안그래도 스카우터들한테 유리몸이라고 찍혔을텐데, 실적이라도 잘 내야 지명받지 않겠어?”
180cm는 훌쩍 넘을까? 웬 키 큰 여학생이 다가와 히나타 씨에게 말을 걸었다. 가만히 있어도 작은 히나타 씨였지만 장신의 여학생이 가가이 다가오자 거의 엄마와 어린 딸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와, 웃으면 안되는데 무심코 웃음이 나올 뻔 했어. 너무 귀여워서…
“저기, 두 분은 운동부이신가요?’
“엉. 배구부다. 이쪽은 곧 졸업하는 틀딱.”
“틀딱이라니~ 꽃다운 19살 소녀한테 너무한다.”
배구부… 확실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정도로 키가 큰 여학생이 하는 운동은 농구 아니면 배구일테니까.
“...잠깐만, 배구요? 히나타 씨도요?”
“왜, 뭐. 불만 있냐?”
“아뇨아뇨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구요! 그냥, 그냥 의외라고 생각해서요!”
“하긴, 치요짱 키가 평범한 배구선수 키는 아니긴하지.”
프로 선수가 아니라 성장 중인 학생 선수라고 해도 운동 선수인 이상 피지컬은 매우 중요하다. 더군다나 다른 스포츠들보다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가진 선수가 훨씬 유리한 배구같은 경우 그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내가 알기론 여자 배구선수의 평균 신장이 176cm정도 된다고 들었는데, 정말 못해도 160cm는 되어야 배구 선수로서 활약할 수 있지 않을까?
“못 믿는 눈치인데? 치요짱은 이래뵈도 청소년 국가대표까지 나갈 정도의 우수한 인재라구.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 리베로! 히나타 치요짱이랍니다~!”
“니미. 내가 언제부터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뎁쇼? 그냥 댁이 멋대로 지어낸 별명일 뿐이잖아.”
“그치만 청소년 국가대표로 나갔던 건 사실인걸~”
“시발, 그거야 워낙 이 땅에 인재가 씨가 말라서 그나마 잘하는 내가 나간거고.”
“이요올~ 자신감~”
신명나게 투닥거리는 두 사람. 아무래도 히나타 씨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실력을 가진 배구선수인 것 같았다. 그것보다 청소년 국가대표라니, 대단하잖아…!
“저기, 실례가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히나타 씨의 신장은 몇 센티미터 정도 되나요?”
“150….”
“147cm야.”
“시발, 내 말 좀 끊어 먹지 마요! 150cm라니까? 그때 쟀을 때보다 더 컸다니까?”
“안 큰 거 다 알고 있거든? 150cm는 무슨, 그냥 반올림 한거겠지.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니?”
“아오 시발, 말 존나 띠껍게 하네. 선배만 아니었어도 아굴창을 갈겨서 병신을 만들어버리는건데.”
우와… 말 한번 진짜 살벌하게 하시네.
긴장해서 쭈뼛거리는 나와는 달리 주장이라고 했던 선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히나타 씨의 욕설을 가볍게 넘겼다. 뭐지, 저 정도 욕은 일상적인 수준인건가? 저 양반 도대체 평소에 어떤 욕을 입에 달고 사는거야?
“에헤헤~ 있지, 치요짱. 이왕 와준 김에 연습 도와주면 안돼? 나 혼자 하니까 공 주우러 가기 너무 힘든 거 있지~”
“에헤헤는 니미, 나이는 쳐먹을 대로 쳐먹으신 분이 지랄을 해요 지랄을. 그래서, 네트는 이쪽 쓰실 거에요?”
“역시 치요짱! 언제나 겉으로는 툴툴대면서 이것저것 챙겨준다니까. 역시 내가 제일 총애하는 후배다워!”
“총애는 무슨, 그냥 마음 가는대로 부려먹을 뿐이잖습니까…”
온갖 생색을 내며 주장 선배의 네트 너머로 가려던 히나타 씨는 멀뚱히 서 있던 나를 보고는 멈춰섰다. 아아, 생각해보니 나는 그냥 집에 가면 됐는데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었네. 나도 참, 정신머리하고는…
“야, 뭘 찐따같이 그렇게 서 있냐? 할 일이 그렇게 없어? 하긴 시발, 같이 놀러다닐 친구가 있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진 않았겠지.”
“죄, 죄송합니다! 금방 집에 갈…”
“할 거 없으면 우리 연습하는거나 구경해라. 그리고…”
“꾸엑!”
나는 갑작스레 얼굴을 향해 날아온 물체에 맞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엉거주춤 일어나 나를 덮친 정체불명의 물건을 살펴보았다. 이건… 지갑이잖아?
“저쪽에 자판기 있으니까 음료수나 사먹고 있어, 병신아.”
...우와. 이렇게 상냥한 욕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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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은 간단했다. 히나타 씨가 공을 띄워주면 주장 선배가 스파이크를 때리고, 히나타 씨가 날아오는 공을 수비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겅중 뛰어서 긴 팔로 매섭게 공을 내려치는 주장 선배도 대단했지만, 더욱 대단한 건 히나타 씨였다. 저 작은 체구로는 절대 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공간까지 순식간에 뛰어가 날아오는 공을 막아냈다. 마치 축지법을 쓰는 것 같은 현란한 움직임에 손에 든 음료수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들의 연습을 지켜봤다.
“으아~ 너무한다! 한 번 쯤은 놓쳐주지.”
“몇 달 쉬었다고 너무 굼떠지신 거 아님까? 프로는 커녕 대학이라도 가겠어요?”
“우쒸, 그렇게 말하면 질 수 없지! 좋아, 덤벼! 이번에야말로 절묘한 위치로 내리꽂아주겠어!”
“아이씨… 저 선배가 기합이 들어가면 항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주장 선배와 불안한 듯 쳐다보는 히나타 씨. 몇 분이 지났을까? 히나타 씨의 불안한 예감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어, 실수!”
줄곧 날카로운 공을 날려대던 주장 선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지 그만 손을 삐끗해버리고 만 것이다. 잘못 맞은 공은 올바른 방향과 멀어지고, 점점 내쪽을 향해서 날아왔다.
...엥? 내쪽을 향해서?
“야, 피해!”
“으아아아아?!?!”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내 얼굴을 향해서 날아오는 배구공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천천히 날아오면 뭐해, 내 몸이 더 느려서 피할 수가 없는데! 그조차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굼뜬 내게 이런 집중력은 괜한 공포심만 늘려줄 뿐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무리 잘못 맞았다고는 하지만, 프로 지명을 노리는 3학년 선배의 강력한 공을 맞고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며칠 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 아냐? 온갖 생각이 폭풍처럼 머릿속을 빠르게 휘몰아쳐갔다. 그리고 그 폭풍의 눈, 거칠게 회오리치는 생각들의 중심. 고요한 그 곳에 한 기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또 니시노야가 구멍이야? 지긋지긋하다 정말.’
‘니시노야 쟤는 왜 저렇게 달리기를 못해?’
‘뚱뚱하니까 그렇지. 우리 세 명 합쳐도 쟤가 더 무거울 걸?’
‘없어? 진짜? 토실토실한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구만. 내 팔뚝을 봐, 얼마나 비실비실하니~’
‘뭐래, 언제는 지 살쪘다고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대더니.’
‘얘보단 나은 거 아님? 얘 보고 나 보니까 엄청 날씬해보이지 않아? 나 다이어트 안해도 될듯.’
‘엌ㅋ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겪었던 수모와 너덜너덜하게 걸레짝이 되어버린 내 체육복,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내 몸까지. 그런 비참한 인생 콜렉션에 배구공을 맞아 팅팅 부은 못생긴 얼굴까지 추가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걸까? 왜긴, 나는 날 때부터 찐따로 태어났으니까. 뚱뚱하고 못생기고, 붙임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소심한 성격을 타고나서 그런거야. 나는… 그냥 이렇게 살 운명이었다고.
‘찐따같이 쫄고만 있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돈이 없으면 없다고 뭐라도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덩치도 큰 게 싸우면 니가 다 쳐바를 것 같구만.’
아냐, 틀려. 난 그냥 자신감이 없었던거야. 찐따로 태어난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찐따로 만든거야. 내게는 충분히 상황을 바꿀만한 힘이, 기회가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모든 걸 운명 탓으로 돌렸지. 남들 앞에 나서는 게 무서워서, 괜히 나섰다가 남들에게 폐만 끼치고 욕만 얻어먹을까봐 잠자코 당하기만 하고 있었던거야. 싫으면 싫다고, 돈이 없으면 돈이 없다고, 뚱뚱하면 운동을, 친구가 없으면 대화를 했어야 했는데, 난 그냥 나 자신의 처지를 가만히 앉아서 비관하고만 있었던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내게 다가오는 배구공은 더이상 무서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날 집어삼킬 것 같이 맹렬하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내 쪽으로 움직여올 뿐이었다. 난 무엇 때문에 이런 하찮은 물건을 두려워했던 걸까? 감정을 지우고, 이렇게 내 눈으로 똑바로 마주봤다면 이렇게나 평범한 물건이 따로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올렸고,
쾅, 하고 공을 내리꽂았다.
“...”
“...”
“...”
망했다.
망했다망했다망했다망했다망했다아아아아아아아~~~~~~~!!!
멋지게 공을 날려보낸 건 좋았는데, 그만 학교 기물을 파손시켜버리고 말았다. 어쩌지, 이거 다른 학교 중학생이 고등학교에 무단침입해서 기물파손까지 시켜버린 상황 아냐? 망했다, 이건 걸리면 가볍게는 안 끝날거야. 단순히 벌청소 하는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백퍼센트, 이거 백퍼센트 징계위원회 열린다고. 망했다, 망했어!
“우와, 이건…”
“말도 안돼, 내가 헛 것을 본건가…?”
히나타 씨와 주장 선배도 어안이 벙벙했는지 멍하니 배구공이 쳐박혀서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선배들도 난감하겠지. 괜히 길가던 중학생 한 명 데려와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었으니.
“야, 야… 너 혹시 예전에 배구 배워본 적 있냐?”
“네? 아, 아니요.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데…”
“미친, 말도 안돼. 배우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완벽한 자세가 나온다고…?”
“방금 부서진 저거, 금속제 아니야? 저거 저렇게 쉽게 부서지는 거였나...?”
“좀 오래되서 약해지긴 했을텐데, 그래도 대단하네요. 와, 시발. 저게 재능충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히나타 씨와 주장 선배는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듯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이번에 있었던 일을 모조리 내 책임으로 돌리려는 건가? 아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 맞지만! 선배들은 아무 잘못 없는 게 팩트긴 하지만!
“....지? 하지만 규정이…”
“괜찮… 나이 제한은 위로만 있으니…”
“오케, 오케.”
규정? 나이 제한? 무슨 소리를 하는걸까, 두 사람은. 설마 아예 본격적으로 고소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무리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학교 기물 부숴먹었다고 고소하는 건 너무하잖아. 고의도 아니었는데…
“야, 너.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네, 네? 니시노야 마후유입니다! 아메가오카 중학교 2학년입니다!”
“음, 그래. 니시노야. 방금 네가 친 사고의 심각성은 잘 알고 있겠지?
“네, 네에…”
“정학은 기본이고, 잘하면 퇴학, 어쩌면 감옥까지 갈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일지도 모르지.”
“히, 히이익!”
“이걸 믿네, 쟤도 참 어지간히 바보인가보다.”
“시발 좀 조용히 해봐요.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으니까. 크흠, 크흠! 아무튼 그래서 앞길 창창한 후배의 미래를 더럽힐 순 없으니, 너의 심각한 범죄를 자비로운 우리가 덮어주기로 했다.”
“저, 정말요? 감사합니…”
“단, 조건이 있어.”
“조, 조건이요…?”
“엉. 참고로 네게 거부권은 없으니 그렇게 알아.”
히나타 씨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식은땀을 흘리면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배구부에 들어와라.”
그것이 초고교급 배구선수, 니시노야 마후유의 첫걸음이었다.
초고교급 배구선수와 땅꼬마 선배 (2) (4) | 2022.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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